반도체_ '치킨게임 시즌2' 개막
인적 드문 도로에서 두 명이 차를 몰고 상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합니다. 두 명 모두 핸들을 꺽지 않고 끝까지 직진하다가 충돌하면 둘 다 죽거나 중상을 당합니다. 한쪽만 피한다면 피한 쪽은 '치킨('겁쟁이'란 뜻의 속어)이 되고, 안 피하고 달린 승자는 '용감한 사람'으로 칭송받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자동차게임에서 유래한 '치킨게임'입니다. 개인만 아니라 기업 사이에도 치킨게임은 종종 벌어집니다. 개인끼리 치킨게임의 승자와 패자는 '용감한 자-겁쟁이'로 평가가 갈리는 데 그치지만, 기업 간 치킨게임은 의미가 판이합니다. 승자는 시장은 독식하고, 패자는 문을 닫게 됩니다. 기업 간 치킨게임이 더 처절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여러 산업 가운데서도 21세기 들어서는 반도체 치킨게임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치열합니다. 2007~2008년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은 D램 가격을 6.8달러에서 0.5달러로 극단적으로 내리면서 생사를 건 경쟁을 벌였습니다. 팔수록 큰 손해를 보는 싸움인데, 자금력과 의지가 약한 쪽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메모리 치킨게임은 2010년대에도 수시로 벌어졌고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정도만 살아남아 과실을 독점했습니다. 일본의 도시바와 엘피다, 독일의 키몬다 같은 수많은 메모리 기업들이 줄줄이 사라졌습니다. 잠시 조용하던 반도체 치킨게임이 2021년부터 다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규모가 훨씬 더 큰 비메모리 분야입니다. 비메모리 분야의 패권을 잡기 위한 치킨게임은 기업 간 경쟁의 수준을 넘어 국가대항전으로 커졌습니다. 2021년 자동차 생산대란이 차량용 반도체 부족에서 비롯된 것처럼 '현대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산업이 지닌 비중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1. 최고 실적에도 삼성전자 주가가 하락한 이유
2021년 3분기 삼성전자는 매출 74조 원, 영업이익 15조 8천억 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동기 대비 매출 10%, 영업이익 28% 증가한 수치입니다. 사상 초유의 매출 70조 원을 돌파한 것이고, 영업이익도 2018년 3분기 반도체 슈퍼사이클 기간의 17조 5천억 원에 이은 두 번째 성적입니다. 역대급 실적에고 불구하고 발표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오히려 7만 원이 깨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주가는 기업실적을 반영한다'는 증시의 기본공식이 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2022년 메모리 업황의 불확실성에다 오너 일가의 상속세 부담도 한몫을 합니다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삼성전자가 버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금으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2021년 8월 25일 삼성그룹은 "향후 3년간 24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와 바이오산업을 키우겠다"라고 발표합니다. 삼성이 밝힌 투자금액 240조 원 가운데 200조 이상이 삼성전자의 반도체에 집중되며, 특히 비메모리 분야가 중심입니다. 메모리반도체 글로벌 최강자인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분야에 200조 원을 쏟아붓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시장에서는 '반도체 치킨게임 시즌2의 개막'으로 해석했습니다. 비메모리 파운드리 분야 일인자인 TSMC(대만)와, 파운드리 재개를 선언한 인텔(미국)을 향해 직진 엑셀레이터를 밟았다는 것입니다. TSMC는 삼성전자가 지금까지 싸웠던 적수들과 차원이 다른 강자입니다. TSMC의 2021년 3분기 매출은 17조 5천억 원, 영업이익은 7조 2천억 원이었습니다. 영업이익률이 '꿈의 이익률'로 불리는 40%를 넘어 41.2%에 이르는 큰 수치입니다. 그런 TSMC와 맞서 3개년, 12분기 동안 200조 원을 투입한다는 삼성전자죠,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비메모리 치킨게임의 전비는 매분기당 16조 6천억 원에 이릅니다. 대형 M&A도 필수인데 삼성전자에 꼭 필요한 네덜란드의 차량용 반도체 회사 NXP의 몸값은 500억 달러, 60조 원에 이릅니다. 치킨게임의 막대한 소요자금에 비하면 역대급이라는 15조 8천억 원의 3분기 영업이익으로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최고 수준의 실적에도 삼성전자 주가가 내린 본질적인 배경입니다.
2. 국가대항전으로 커진 '반도체 치킨게임 시즌2'
보통 시리즈물은 시즌2가 시즌1보다 재미가 없다고 하죠? 그런데 '반도체 치킨게임 시즌2'는 시즌1보다 훨씬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메모리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큰 비메모리에서 싸우는 데다 기업 수준을 넘어 국가대항전 성격으로 판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미중 기술패권전쟁에서도 제1의 전장은 반도체입니다. 미국과 중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일본, 대만 등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자국의 반도체 육성을 위해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하기오 했습니다. 2022년 투입이 확정된 금액만도 한국 300억 달러, 대만 260억 달러, 중국 170억 달러 등 사상 최대인 1,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한 대에 수백억 원짜리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비롯한 값비싼 장비를 경쟁적으로 투입해 죽기 살기식 돈을 싸움을 벌일 각오들입니다. 투자를 머뭇거리면 경쟁에 밀려서 죽고 투자전쟁을 계속하려니 역시 죽을 지경입니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반도체 전장에 화약냄새가 자욱합니다.
3. 삼성전자, 치킨게임 시즌2에서도 이길까?
반도체 치킨게임 시즌2는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일등기업이자 투자자 500만 명의 대장주'라는 삼성전자의 비중을 생각할 때 나라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행히 삼성전자에게는 2가지 결정적인 무기가 있습니다.
첫째, 120조 원에 이르는 보유자금입니다. 주로 메모리반도체를 열심히 팔아서 모아둔 실탄입니다. 비메모리 치킨게임은 곧 천문학적 자금전쟁인데 손에 쥔 120조 원이야 말로 삼성전자 자신감은 원천입니다. 둘째, 3 나노 이하 미세공정에서 TSMC를 압도할 비장의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사실입니다. GAA는 공정효율 30% 높이고 전력소모 50% 줄여주는 첨단기술입니다. 삼성전자는 TSMC보다 앞서 2022년 상반기부터 GAA기술에 기반한 3 나노 공정을 시작합니다. 2가지 무기가 잘 통할 경우 현재 100곳 정도인 파운드리 고객사가 300곳 정도로 늘어나고 구글 같은 대형고객까지 몰려들면서 삼성전자 실적은 가파르게 치솟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메모리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처럼 비메모리 치킨게임에서도 삼성전자의 뚝심이 빛을 발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다만 2021년 하반기 삼성전자의 주가흐름이 약했던 데서 보듯이 치킨게임 시기에는 투자금액이 급증하면서 반도체 기업의 주가는 대체로 부진한 편입니다. 반도체 전쟁의 무기는 자금과 기술만이 아닙니다. 미국기업 인텔은 삼성전와 TSMC 등 아시아 반도체기업을 미래안보 위협으로 간주하며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를 상대로 투자금 유치 로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TSMC와 마이크론의 공장을 자국 내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도체 싸움이 자금력 외에 국력과 외교력까지 동원하는 총력전임을 실감케 해 줍니다. 그러므로 투자자라면 산업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글로벌 경쟁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도 파악해야 합니다.
4. 반도체 실적에 좌우되는 코스피 주가흐름
반도체는 성장산업이면서도 경기사이클을 타는 특징이 있습니다. 슈퍼사이클 때는 이익과 주가가 급등하는 반면, 공급량과 수요처의 재고가 늘어나면 실적과 주가가 급락합니다. 반도체는 통상 10분기 정도의 상승사이클과 6분기 정도의 하락사이클을 반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에는 그 간격이 좁혀지는 추세입니다. 반도체 주가는 실적 전망을 6개월 정도 선반영하는 특징이 있어 경기사이클에 대한 이해는 필수입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이 시총 1,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기 때문에 반도체 업황 사이클에 따라 국내증시의 방향성이 정해지기도 합니다. 코스피와 같은 지수에 투자하는 외국계 패시브 자금의 경우 반도체 업황이 나쁘면 한국증시 자체에 대한 투자금을 줄이기도 하므로 다른 업종의 주가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반도체 종목 투자자가 아니더라도 반도체 업황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내주식 투자자라면 종목에 관계없이 글로벌 반도체 수요와 공급사이클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하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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